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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용 |  KIM Kang-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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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김강용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성장하고 한국에서 교육받은 화가이다.

화가로서의 비젼은 김강용 스스로 독특하게 만들어낸 것이지만 화면에 대한 그의 개념주의적인 접근은 조선후기 한국화의 역사에 도도히 흐르는 일종의 추상주의와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김강용은 서양의 리얼리즘이나 하이퍼리얼리즘보다 박서보나 윤형근같은 현대한국작가들과 더 가깝다. 몇몇 서구의 비평가들은 김강용의 정확하게 그려진 그림을 후기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역으로 단순하게 배 치할지도 모른다.그렇지만 나는 김강용의 작품을 아시아 고유의 문화로부터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다할지라도 김강용 자신이 스스로 붙인 작품의 제목인현실 + 이미지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 서구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태리 르네상스기 피에로 델라 프란세스카나 우첼로가 도입한 선에 의한 원근법을 확장된 형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의 위도와 경도 같은 담벼락들, 한 모퉁이에서 폭포처럼 우르르 쏟아져 내려오거나 화면의 밑바닥에서부터 퉁기쳐 나오는 벽돌 뭉테기들을 자세히 보면서 나는이것이 왜 벌어지는지를 성찰해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벽돌들의 뒤에 있는 작가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파악하기 전에 화가가 주제를 선택한 것이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를 알아내보고 싶은 유혹이 우러 나온다. 김강용의 그림은 단순히 정확하게 그려진 이미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공간에 관한 것이고 그 공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환상에 관한 것이다.

음영에 따라 벽돌을 일일이 세는 듯한 정밀함을 얻기 위해서 김강용이 수학적인 접근 방법을? 쓰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근본 개념은 수학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그는 르네상스적 관점을 적용하고 데카르트적 논리를 불교적 명상에서 나오는 본질적으로는 직관적인 개념에 응용한다. 김강용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마음 속에 모든 잡념을 없애는데 관심이 있다. 서구적인 관점과 논리로부터 만들어내면서 어떤 때에는 그 선입견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엄청난 촛점과 집중을 필요로 한다. 만약에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아무 것도 못 본다면 이것은 벽돌을 보는 것보다 더 핵심에 가까이 간 것이다. 김강용 자신의 비젼에서 보면 그의 작품은 공간과 환상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그림은 비어 있고 형체가 없다. 궁극적으로 캔버스 위에 묘사된 공간은 불교에서 일컫는무심’, 즉 모든 잡념이 떠난 빈 마음의 공간이 된다. 이것이 명상의 목적이고 이 작품들은 그 과정의 증거가 된다.

서구에서는 동양 문화내에서의 차이점을 보기 보다 서구문화와 상반된 점을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의 세계화를 받아들이는 서구 관객들은 상업적 미디어의 거울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들을 같은 것처럼 바라보려고 한다. 주로 비엔날레 체제를 통해 현대 예술의세계화가 공격적으로 전개된 상황에서 예술의 난해함을 포획하여 어떤 식으로든 잡아 매어 두려는 충동이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특히 이러한 추세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그렇지만 예술은 이렇게 쉽게 구속하거나 한계를 긋거나 붙잡아 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아이디어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강용의 그림은 완전히 구상도 아니고 추상도 아니다. 그 중간 쯤에서 부유하는 것 같다. 이러한중간쯤의 공간을 불교의 허무와 관련지어서 볼 수 있다. 이 공간은 특정범주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의 영원히 흐르는 무상함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그의 그림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믿는다. 그의 그림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지각력을 시험하는 방법이나 그림을 감각적 지식의 한 형태로 보도록 독려하는 방법에 있어서 예외적으로 뛰어나다고 믿는다. 나는 그림이 일상 생활에서 더불어 살아가며 반추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좋아한다. 상징주의 시인인 말라르메가 멋지게 말했듯이, “ 암시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지만 규정하는 것은 파괴하는 것이다”. 김강용의 작품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나는 관객이 작품을 보기 전에 평가하는 식으로 하고 싶지 않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작품을 평가하는 것에 선행한다. 말라르메는 관객이 감상하는 것의 잠재력을 파괴하기보다 그림의 실체를 드러내는 인식의 문을 다시 열라고 용기를 북돋워 준다. 김강용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는 그의 그림을 줄곧(
)’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그 창은 명상을 통해서 공간의 구조를 관찰하는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창이다. 17세기 프랑스의 클로드 로랭의 비유를 믿는다면 그림은 그야말로 환상의 창이다. 클로드와 한국의 공간 화가들 간에는 연관성이 있다. 허무(虛無)와 부동(不動)을 던져버리지 않으면서도 인식을 향한 적절한 수단을 찾는 것과 김강용이 작품을 통해 내재한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 김강용의현실 + 이미지작품들을 접했을 때에 느낌이 전적으로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도록에 나와 있는 작품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혼돈이 왔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벽돌 더미 그 착각은 정말 그럴 듯했다. 이 흔해빠진 벽돌들을 형식적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그림의 개념적 의도는 무엇일까? 화면 밑에 어떤 정치적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일까? 어떤 종류의 시각적 담론이 있는 것일까? 인류 역사의 질서와 무질서를 환기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전쟁과 자연재해 등에 의해 건설과 잔해가 반복되는 대칭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말로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김강용의 그림에 대해 자꾸 질문을 하면 할수록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발견한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쓸 때에 정말로 놀라게 되는 것은 그림을 통해 표현과 발견을 해야한다는 필요성이 다시금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소 신비스러우면서도 이 기막히게 뛰어난 이미지들을 검토해 가는 과정에서 그 이미지들은 나의 잠재의식의 각 층 속으로 스며 들기 시작하면서 실재에 대한 나의 감각 뿐만이 아니라 예술 비평가로서의 나의 역할에까지 도전해 온다.

김강용의 작품을 탐구하기 시작했던 처음부터 나는 스스로 했던 질문들이 너무 논리적이고, 규정적이며, 심리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주체와 대상, 자아와 비자아, 인식자와 피인식자 따위들에 기반을 둔 이중성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중성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 작동하는 것 같지 않았다. 김강용은 벽돌을 주제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 벽돌은 실제로 환상이었다. 벽돌은 벽돌이 아니고 다른 세계로의 창이며 그림의 세계로 연결되는 창인 것이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고운 모래와 접착제와 섞여서 고르게 잘 발라져 있는흙 색깔위에 그려져 있는 것은 밝고 어두운 그림자일 뿐이며, 순서있게 질서 정연하거나 아니면 혹은 무질서하고 혼잡한 기하학적 배열일 뿐이다. 김강용은 눈으로 벽돌을 보고 그리지 않는다. 그림에 대한 전체 시나리오는 오직 화가의 마음의 눈에서만 펼쳐진다. 왼쪽 구석에서부터 시작하여 화면 전체를 훓듯이 천천히 오른쪽 구석까지 그린다.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것이지만 가상의 행동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듯이 하는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그리면서 손으로는 벽돌의 표면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매 단계마다 벽돌의 각 형태를 충분히 의식하면서 그려나간다. 한 단계 높인 원근법을 이용하여 작가의 마음을 통해 보이는 대로 밝은 쪽과 어두운 쪽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음영을 거꾸로 뒤집어 놓기도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김강용은 기억을 통해 내면화된 관점을 그리는 것이다. 벽돌 하나 하나는 그의 마음 속에서 창조된 것이며 작가가 외부의 시각 세계에서 빛을 관찰하면서 알게 된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진처럼 베낀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 하나의 벽돌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각 벽돌의 요소나 형태는 모래가 섞인 까끌거리는 색깔을 띈 중립적인 토대를 그 때 그 때 조절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으로서 아무 것도 없는 텅 빔에서 공간을 창조해냈는데, 이 공간은 눈에 보이는 공간이다. 마침내 이 공간은 일반언어에 의해벽돌로 인식되어진다. 일부러 형식적인 순서를 만들지도 않았고 미리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품은 것도 아니다. 단지 기하학적인 선과 돌 조각들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이나 다양한 결합과 변경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한 단계 고양된 촉각적인 표현을 달성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인식과 존재를 넘는실재를 성취한 것이다. 개개의 벽돌은 이 실재를 창조하는 정신적인 단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김강용의 그림은 한국미술학계에서 부르는 이른바서구적 스타일에서 온 아카데믹한 방법과 기술을 되풀이한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색깔이 단순하고 건조하다. 이것은 프랑스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가 논의한 바 있는폭탄의 낙하점’(ground zero)에 항상 존재하는 일률적인 단조로운 색깔과 같다. 바꿔 말하면 김강용은 자신의 그림을 전혀 새로운 차원, 본질적인 차원으로 끌고 가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방법으로 그림의 토대를 다시 검토하도록 한다. 아마 이 새로운 방법은 동양적 관점으로 그림을 검토하는 것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동양적 관점은 동양 철학, 특별히 전통적인 심미체계와 많은 연관이 있다. 그의 ‘ground zero’는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명상적이고 실질적인 뿌리가 있다. 그의 그림이 불교의 어떤 점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 볼 때에는 이미지들이 표면적으로 불분명하지만 시간을 조금 두고 볼수록 한층 승화된 복합적인 형태 속에서 이미지가 나타난다. 그의 그림은 세잔느의정물화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또 세잔느의 정물과 관련시켜 볼 때, 특히 1909년과 1911년 사이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신비한 큐비즘과도 연결이 되 있다.

어떤 이들은 김강용의 그림을 단지 기술적인 근거에서만 갖고 걸작이라고 할 지 모른다. 그의 그림이 기술이 뛰어난 역작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림에서 기술은 여느 예술적 표현수단과 마찬가지로 -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과 분리될 수가 없다. 기술적인 근거로만 그림을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이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한국인 김강용은 단순히 기술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심오하고 좀 더 실재를 향해 열려 있는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다. 작가는 선택 가능한 또 다른 세상을 찾기 위해 인간 정신의 영역을 깊이 들어간다. 다른 모든 중요한 예술 작품에서처럼 그의 작품 속에도 작가의 문화적 특성이 배어 있고 또 그 한계 너머로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을 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문화는 전통보다 좀 더 즉각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문화는 인간의 감각 체계로 볼 수 있고 또한 좀 더 쉽게 느낄 수 있다. 김강용에게 문화는 형태에 선행하고, 개인의 정체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레오나르드의 문화는 호쿠사이의 문화와 다르며 폴락의 문화는 피카소의 문화와 다르다.

어떤 이들이 볼 때는 그림에서 주제로 사용한 벽돌이 상대적으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게 표현된 말이다. 벽돌의 의미에는 복잡한 것이 하나도 없다. 큐비스트처럼 색깔도 다양하지 않다. 실재의 추상화에 강조를 두고 있다. 이 그림들은 형태와 공간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 결국엔 텅 빔에 관해 분명하고 정확하게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들은 아주 특별한 예술 작품이다.

- Robert C.Morgan -